기억이란 건, 오래된 기억일수록 부정적인 감정은 옅어지고 좋았던 장면만 남는다고 합니다.
(이걸 "장밋빛 회상"(Rosy retrospection)라고 합니다.)
군대에서의 힘들었던 기억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보정되어 추억이 됩니다.
하지만, 모든 기억이 다 그런 건 아닌가 봅니다.
사라지지 않는 후회
후회되는 일은 '그때 왜 그랬을까' 하며 스스로 계속 곱씹게 되어
쉽게 잊히거나 옅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.
언제 놀러 가도 맛있는 걸 만들어주시며 저를 많이 예뻐해 주시던 할머니가
당뇨와 여러 합병증으로 인해 중환자실에 입원하시게 되고 나서
오랫동안 할머니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되었었습니다.
그러던 어느 날 온 가족들이 다 함께 병원에 계신 할머니를 보러 가게 되었습니다.
오랜만에 본 할머니는 주기적으로 소리를 내는 여러 기계들에 둘러싸여 침대에 누워계셨습니다.
코에는 관을 꽂고 계셨으며, 고개도 잘 돌리지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.
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. 그래서 할머니의 손을 잡아주라는 말을 들었을 때
저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. 15년이 넘도록 시간이 흘렀지만, 아직 그때의 제 행동이 후회됩니다.
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.
아버지가 이사를 할 때 냉장고와 책상처럼 무거운 걸 옮기는 것을 도와주러 갔었습니다.
무거운 원목 책상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다가 밀려 쓰러질 뻔한 그때
저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하며 신경질을 내고 말았습니다.
그 후 사과했지만, 그 상황을 되돌아 생각해 봤을 때 신경 쓰이는 점은,
그가 아버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나는 똑같이 행동했을까라는 점입니다.
아마 아닐 것입니다.
제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상대가 그였기 때문일 것입니다.
나는 왜, 그에게 확실하게 이거 때문이라고 말하지 못할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.
그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한 게 있다고.
그가 저에게는 쉬운 걸 모르고, 물어보기만 하고, 알려고는 하지 않는다고 느껴서?
그때 육체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에? 아버지와 아들이라서?
아니면 가정이 분열된 원인의 책임이 그에게 있다고 생각해서?
그런 건 자위를 위한 구차한 변명에 불과합니다.
잘못이 있다면, 첫 번째로 체력이 부족했으며 그 상황에서 옳게 행동할 만큼
성장하지 못한 저에게 있고. IMF 때 한 번 쓰러지고 나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으며,
저의 학창 시절 단 한 번도 학교 행사에 와주지 못했을 만큼 쉬는 날 없이 노동했고,
박봉이었으며, 그렇게 10년을 넘게 일하고도 퇴직금까지 주지 않고 떼먹은 회사에 잘못이 있고.
그런 선해빠진 사람을 꼬드겨 가치 없는 땅을 팔아먹은 사기꾼에게 잘못이 있습니다.
그는 거의 모든 중장비와 대형 트럭을 운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
엔진과 미션까지 오버홀 할 수 있으며, 그것은 제가 전혀 알지 못하는 세상입니다.
이런데 어떻게 그의 선함과 무지를 문제 삼을 수 있겠습니까?
그저 열심히 일하는 방법 외에 돈을 버는 방법을 알지 못했을 뿐일 것입니다.
그 누구도 모든 분야에서 뛰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.
그는 자신을 기계부품처럼 희생하여 우리 가정을 지탱했던 가장이며 아버지입니다.
그런 그에게만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.
책임이 있다면, 모든 가족 구성원들에 있을 것입니다.
이것이 진실입니다.
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.
뇌는 나에게 종종 거짓말을 합니다. 아마도 나를 지키기 위해서,
계속 좋은 사람으로 남아있기 위해서 내가 나쁘다는 걸 교묘하게 부정하려 합니다.
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.